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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향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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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8-19 00:35 조회8,804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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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인디고 유스 북페어의 프로그램 중 "미래를 향한 용기" 포럼에서
정치학자 박명림 선생님과 함께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고민할 문제와
그를 해결해낼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청소년과 청년들은
'개인의 존엄', '법과 제도', '국가, 자본, 시민사회', '민주주의와 세계시민주의'라는 주제로
발제를 하고 이에 답변을 듣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박명림 선생님은 기조 발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래를 향한 용기라는 주제를 생각해봅니다.
미래란 현재의 순간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거시적인 결과물입니다.
즉, 지금의 결심과 마음의 상태, 선택에 따라 그것들이 집적되어 미래를 온전히 결정되지요.
지금 한 사람의 선택과 한 사회의 선택이 비록 미미해보일지라도, 결국 그것에 따라 미래는 결정됩니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용기입니다.
용기란 영혼이 하는 일입니다.
당장의 물질적 풍요와 안위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의지가 바로 용기인 것입니다.
인문학은 대개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왜 아픈 사람과 약한 사람들을 보아야 하는가는 분명합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심장도, 머리도 아닌 바로 지금 아픈 곳입니다.
이 아픈곳이 치유되지 않으면 우리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 온 정신을 쏟아 고쳐야 합니다.
우리 사회, 이 세계가 하나의 몸이기에 우리는 아픈 곳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그
래야만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향한 시각vision, 생각idea, 이론theory 모두 '본다'라는 어원을 갖습니다.
즉,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결정됩니다.
여기 모인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미래를 향한 용기를 위해 우리가 함께 나눠야 할 주제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함께 어떻게 미래를 향한 용기를 낼 것인가 함께 고민해보았습니다.


1. 개인의 존엄성
[청소년 발제]
박경민(18세)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존엄과 여러분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으신가요? 아니면, 현실 속의 여러 장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어쩌면 많은 분들이 나의 존엄이나 신념에 대해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 학교 국어선생님께서는 김선우 시인의 「단단한 고요」을 낭독하시다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 인사하는 소리” 라는 이 구절은 도토리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묘사한 것일 뿐이지만,  마치 그 때에도 차디찬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던 단원고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의 울음은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존엄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그 당연함을 기꺼워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가시던 교장 선생님께서 울음을 그치고 수업을 다시 진행하라고 얘기하셨죠.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성보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교뿐만이 아닙니다. 학생들마저도 스스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갈 지와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기에 자신은 물론, 타인에 대한 이해마저도 너무나 부족합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잘 사는 삶이 아니라 나의 존엄에 대해 고민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질문을 잊지 않아야 할 텐데요.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의 무엇이 아주 기본적인 개인의 존엄, 인간의 존엄을 잊게 만드는 걸까요? 그 속에서 개인들이 그들의 존엄을 지키며, 사회에서 옳은 목소리를 내고, 그것이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청년 발제]
윤한결(26세)
존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키고, 그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사회·경제적인 환경을 지속적으로 보장받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청년들에게 신념과 가치를 지키는 일은 생과 사의 문제와 직결되는 절실한 문제입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관심이 없는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물질적 부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권력의 억압과 경제적인 궁핍에 직면할 수밖에 없지요.
예컨대 옳은 가치를 실현하려는 일터, 공동체에서 도리어 최저임금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너무나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에 노동권을 침해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없습니다. 물질적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떠난다면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그곳에 계속 남아 있는다 하더라도, 좋은 가치를 실현하는 사람들이 사회의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당연하게 만드는 한 사람이 될 뿐입니다. 아무것도 다르지 않은 이 둘 사이의 선택을 ‘자유’인 양 포장하고, 강요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멘토가 유행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누군가로부터 지지받고 응원 받는 것만으로는 존엄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멘토는 도전하라는 말로 그러한 경쟁사회의 야만을 은폐하려고만 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기로 앞에 선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와 함께 논의할 수 있으며 우리 사회가 그런 개인들을 지키고 키워내기 위해 지향해야 할 공준은 무엇일까요?

[박명림 선생님 답변]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인간humane의 어원은 '흙', 즉, 하늘이 아님을 뜻합니다. 세속적이라는 것이지요. 그 의미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적당히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존엄이란 바로 이것에서 기원하는데, "모두가 똑같이 알맞게 주어진 존재"인 것입니다.
즉, 인간의 존엄이란 바로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못하고 성적, 재산 등으로 보기 시작하면 인간의 존엄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좋은 스마트폰을 가지길 원하고 좋은 성적을 받길 간절히 바라지만, 위험에 빠진 순간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스마트폰과 성적이 그들을 구해내지 못합니다.
존엄을 지켜내는 것은 좋은 시민이 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정의로운 가치와 옳은 신념을 가져 공적으로 옳은 인간이 되는 것 말이지요.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곧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시민은 모두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로 자신의 그 존엄함을 스스로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을 경멸하지 않게 되면, 돈과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면, 결코 인간의 존엄함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2. 법과 제도
[청소년 발제]
김기환(17세)
법과 제도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그리고 엄격한 기준을 갖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법이 정말 공평하고 엄중히 적용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부산의 교육감이 바뀌어서 부산의 고등학생들은 2학기부터 야간자율학습을 정말 '자율'로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 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제일 처음 반응은 어떠셨나요? 저는 ‘에이 설마’ 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이 생기더라도 각 학교에서 잘 지켜지지 않고 쉬쉬 진행할 거라고요. 아마 남들은 다 야자를 안 하니 지금 우리가 해야 성공한다고 얘기하지 않을까요?
 또 한편으로는 동아리 같은 경우도 저희 학교는 나름대로 활동이 활발한 편이지만 다른 학교들은 허울뿐인 동아리 시간이고 자습을 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진로교육, 학생 자치 등 학교에는 우리를 훌륭한 어른으로 길러내고 인성을 위한다는 것들도 솔직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진지하게 참여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아이들은 그 시간에 떠들거나 자습을 하기도 하거든요. 학교를 졸업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습니다. 육아휴직 문제나 선거공휴일 등도 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눈치가 보인다는 것 같습니다. 법이 제정된 것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일 텐데, 무엇이 이렇게 권리를 지키기 어렵게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 문제가 법에 대한 존경심은 없고 눈앞의 경쟁에 더 바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더라도 각 학교나 회사, 학생들이 경쟁심을 갖고 초조해한다면 제대로 시행되기 어렵겠죠. 선생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청년 발제]
양재평(26세)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에 대해 공부할수록,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미비한 측면이 있지만, 더욱 더 중요한 문제는 이미 존재하는 법과 제도조차 현실과 괴리되어 있어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청년유니온이라는 노동조합에서 편의점 알바노동자들의 노동실태를 조사해본 결과 불과 5% 정도의 노동자들만이 최저임금을 제대로 받고 있었습니다. 근로기준법 상에 보장되어 있는 주휴수당이나 휴게시간, 퇴직금 등 여러 가지 노동자의 기본 권리들이 현실에서 지켜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당장 내 피부로 겪게 되는 최저임금법이나 근로기준법도 현실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데,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가치지향적인 헌법은 더 말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 역시 한 번도 이 땅에 실현된 적 없다는 의견이 많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새로운 법과 제도를 갖추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참사도 특별법이 만들어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안전에 대해, 생명에 대해 경외를 갖고 이 비극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듯이요.
그렇다면 법이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걸림돌은 무엇일까요? 또한 법전에 나와 있는 현법조문이 현실에서 실효성을 갖기 위해 제도적 차원에서 보완되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박명림 선생님 답변]
법이란 곧 정의입니다. 즉, 고르게 한다는 의미이지요. 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익명성의 원칙이라 생각하는데, 사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만 보고 판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법은 힘있는 자에게 재갈을 물리게 됩니다. 고르게 하기 위해서는 힘있는 자에게 제동을 걸어야 함이 마땅하지요. 그렇게 법을 지키면 정의가 실현되어,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데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반영된 제도가 구성되게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이익이 대변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킬 약속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3. 국가-자본-시민사회
[청소년 발제]
이창희(17세)
여러분은 과연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은 어떤 사회이며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궁금하신 적 없나요? 저는 보이지도 않고 잘 느껴지지도 않지만 제가 살고 있다는 이 나라가 참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고민한 결과 여러 사회 요소 중 자본, 정치권력, 시민사회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 새로운 세대에 필요한 힌트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한국사회가 가진 세 요소의 모순점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시민사회는 자본과 정치권력을 탄생시킵니다. 자본과 정치권력의 근원은 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근본적인 시민사회가 자본과 정치권력에 아무런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왜 지금의 자본과 권력은 시민사회의 눈치를 보지도 않고 오히려 시민사회나 법, 제도 이상의 우위에 서 있는 걸까요? 그들은 어떻게 시민들의 목소리를 모른척하면서도 이렇게 잘 유지될 수 있을까요?
청소년의 상황에 빗대어 본다면, 현재 청소년에겐 교육감 투표권도 주어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교육을 받는 건 우리지만, 교육감 선거에서 기회조차 없으며 선택하는 건 우리가 아닌 어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분노하는 학생들은 주변에 많지 않습니다. 교육감 선거에서 모든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문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정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교육감 투표권이 없거나 그 외에도 세월호 참사나 핵발전소 같이 생명의 문제가 달린 일에서조차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에 익숙해져 온 것입니다.
저는 시민사회가 자본과 권력에게 억압 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우리가 그 상황을 만드는 것이 아닌지도 고민이 됩니다. 우리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스스로 굴복하는 건 아닌지요? 그래서 우리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눈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건지 궁금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대를 만들기 위해 한 가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우리가 시민사회에 어떻게 권력을 줄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해 최소한의 존엄과 공동선이 지켜지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우리가 구성해야 할까요?

[청년 발제]
김상원(22세)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큰 축으로 자본과 국가, 시민사회를 생각해본다면, 저는 이 셋이 가진 불균형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가는 자본에 예속되어 더는 시민들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고, 시민사회는 경쟁과 불안에 지쳐 모두 각자의 삶만을 걱정하느라 공공의 문제를 모른 체하는 형편이며, 오직 자본만이 초월적인 힘으로 모든 것의 우위에 서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강력한 시민의 힘만이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저는 자본이나 국가권력에 대해 무력함을 느낍니다. 입시 시스템에 반발이 들 때도 이곳을 벗어나는 극단적인 선택 말고는 없었고, 핵발전소 앞에 살면서도 안전한 곳으로 이사 가는 것 외에는 예방책이 없으며, 2000명이 넘게 죽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공격을 멈추기 위해 이스라엘을 위협할 방법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에 무기를 수출하는 3위 국가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화가 날 때마저 경제적 이유를 들먹이는 사람들 앞에서 무력하고,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시위에 나서거나 불매운동을 벌이는 것마저 무시당하죠.
과거 흑인들은 버스 타기를 거부했고, 인도인은 직접 물레를 돌렸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세금을 내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도 개인으로 충분하지 않고 연대라는 이야기는 쉽지만 현실은 안개가 자욱한 듯 내일을 예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권력이 사실상 우리의 삶을 완전히 속박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옳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박명림 선생님 답변]
시민사회가 강해져야만 자본과 국가 역시 정상적으로 운영이 가능합니다. 시민 사회란 앞서 말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이지요. 즉, 공공적인 것을 향상시켜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바로 시민사회입니다. 수많은 통계자료를 보면, 시민사회가 강한 나라일수록 '불행의 요소'들이 적습니다. 자살율이나 범죄율, 실업률 등의 '먹고 사는 문제'에서 안전할 수 있지요.
문명화란 곧 시민사회의 활성화입니다. 기계화나 산업화가 문명화가 아니란 말이지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국가의 수장은 '대통령PRESIDENT'입니다. 즉, 공적인 대표입니다. 어떤 이익을 대변하는 사장이나 CEO가 아니지요. 'CEO 대통령'이란 어불성설입니다. 결코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국가란 시민사회를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4. 민주주의와 세계시민
[청소년 발제]
김은비(17세)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많은 어른들은 우리에게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지만 사과 이후 무엇도 실제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른들의 사과가 결국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사과로만 남아버린 것 같습니다.
저는 기성세대가 이 비극의 사회와 함께, 이 무책임함, 그 안의 분노나 원망까지도 우리에게 물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대로 가다가는 다시 이 모든 일이 악순환 되겠다는 생각에, 저는 어서 빨리 새로운 삶의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후대에게 책임 질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그 분야가 무엇이 되던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두렵기만 합니다. 분명 새로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진실과 정의가 다수가 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벽에 가로막혀 굴복하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평범함과 적당함을 넘어 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데, 분노하고 또 수치스러워 하면서도 앞장서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이런 우리 세대가 쓸쓸한 영웅이 아니라 함께 희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지 못해왔던 것이며 행동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선생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청년 발제]
이혜진(22세)
사회에는 수많은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성한 공동체의 개선을 위한 참여는 권한이자 책임의 이중성을 갖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타자를 위한 헌신이자 자기 삶을 위한 자기애의 표현이기도 하지요. 단순히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참여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는 정치행위를 말합니다. 박명림 선생님께서는 이 정치행위를 통해 가치배분을 하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의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고도로 진행된 세계화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의 확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책임을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지요.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원자화된 개인들이 사적인 일에만 몰두하고, 각자의 성공을 위해 생의 많은 시간을 쏟아 붇도록 합니다. ‘글로벌 교육’을 외치면서도 전 세계적인 시민의식을 길러주지 못하는 현실을 통해 그 폐해를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글로벌’이란 원어민 교사를 유치하고, 그를 통해 학생들의 회화 실력을 기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절망하기엔 이릅니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만큼 다원적이고 통합된 세계 공동체를 이룩할 가능성을 지닌 순간이 없었다고 프란시스코 교황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세대이며 가장 다양한 문화에 열려 있는 세대입니다. 또한 내가 하는 행위가 지구 반대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화 세대입니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것부터가 청년들에게 희망이고 확신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진짜 삶의 기술을 배우는 자생적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세계시민교육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박명림 선생님 답변]
사유의 범위가 존재의 범위입니다. 즉, 우리가 사유를 어떻게 하냐에 따라 우리 존재의 크기는 달라질 수 있지요. 세계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매우 많습니다. world, earth, globe 등이 있지요. 지금 우리가 말하는 세계란 바로 world 이겠지요. 우리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면, 세계는 그저 땅덩어리일 뿐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매우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 누구도 인간의 탄생을 규정하진 못합니다. 그렇게 태어난 인생이기에, 언젠가 한번은 기회가 오지요. 그렇기에 세상의 부름에 응답해야 합니다. 세상의 부름에 응답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이를 내 사유의 범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즉, 이 세계에 비로소 내가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세계시민적 사유는 역설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것을 변화시키는 데서 시작합니다. 넬슨 만델라가 자신을 가둔 백인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끝끝내 포용하고 인내했던 것은, 가장 가까운 간수를 바꾸게 됩니다. 그것이 만델라가 최초로 변화시킨 사람들입니다. 그 마음은 결국 세계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변화를 일으킵니다. 즉, 사유의 범위가 존재의 범위이며, 그것이 곧 변화의 범위입니다.
우리가 그를 살아내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첫째, 인내입니다. 오래도록 지속하면 강해지기 마련입니다. 둘째, 준비해야 합니다. 존엄을 지켜내고 그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단히 준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간절해야 합니다. 정말, 간절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바랄 때, 새로운 시대는 분명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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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럼을 통해 우리가 왜 존엄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는지,
그를 위해서는 공동체를 만들고, 연대해야 하며,
전 세계적으로 사유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역시 그러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에 이어, 우리가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래를 향한 용기를 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또 절실한지,
함께 이야기해주세요.
박명림 선생님, 그리고 참여했던 모두에게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곳에 남겨주시거나
이 시간에 나누었던 것에 대해 여러분도 의견을 댓글로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이한결님의 댓글

이한결 작성일

'인디고잉' 44호를 읽으면서 북페어 때 기억이 많이 떠올라 글을 올립니다. 'incarnation'. 그리고 '나에게 들어오지 않는 객관은 나에게 의미없는 것', 이 부분이 강연에서 참 많이 와닿았었습니다. 살을 뚫고 들어온다는 단어의 의미처럼, 그 정도로 스스로가 무언가를 느끼고 절실함을 가지지 못한다면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더라도 삶을 더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거나, 성장한 모습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실패한 경험, 좌절했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의 절실함' 이 아니었다는 것과 '나만 깨어있다' 는 식의 오만과 편협함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길게 쓰는 것은 부적절할 것 같아 줄이자면 '나만 공부 잘 하고, 타인을 위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다' 와 같은 생각을 갖고 살아오면서 제 의무는 안하고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때때로 인디고 서원을 들어오면서 인디고의 여러 좋은 가치들을 제가 자신을 정당화 하는데 쓰고 있지는 않은지...와 같은 생각이 들어 겁이 나곤 합니다.

미래를 향한 용기를 내기 위해서 나 스스로에게 무엇이 절박하고 필요한지, 그것을 위해서 내가 삶의 작은 시간이나 사소한 습관들까지도 거기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현재를 쌓아올려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절실함이 한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렇게 쉬운 거면 의사,박사,변호사,판사 몽땅 다 갖다 니 꿈 하지 왜?' 가 아닌지를 항상 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묻고 싶었던 이야기는, '선생님께서,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각자의 길을 걸으며 내가 틀린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함, 이기심이나 개인적인 욕망에 대해 어떻게 자신을 다잡으셨는지...' 입니다.

김영현님의 댓글

김영현 작성일

'미래를 향한 용기를 직시하려면 반대로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로 파악하고 있는지 직시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수정부탁 드려요.^^'

김영현님의 댓글

김영현 작성일

미래를 향한 용기를 직시하려면 반대로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로 파악하고 있는지 직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치 적 진영을 경계하듯이 말이죠. 최근에 ‘화성인의 지구 정복’(they live)이란 영화를 봤습니다. 이 영화에는 ‘존 나다’라는 캐릭터가 나옵니다. 그는 떠돌이, 노가다 생활을 하는 인물로 우연히 선글라스를 줍게 됩니다. 이 선글라스를 쓰게 되면 인간인 척하는 외계인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도시의 미디어(광고, 방송, 잡지)들의 프로파간다(선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비하라’는 광고 문구는 ‘순종하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에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화성인들을 무찌르기 위해 시민인 척 행세하는 외계인들에게 총을 겨누게 됩니다. 그는 시민들에게 범죄자 취급을 받다가 결국 선글라스를 사용하는 세력들과 만나면서 화성인들에게 대항하게 되고 방송국 안테나를 폭파시키면서 자신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화성인의 실체가 시민들에게 드러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이 영화 중에 존 나다는 친구에게 선글라스를 억지로 씌우기 위해 거의 8~9분 동안 싸움을 펼칩니다. 화려하죠. 하지만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는데도 친구는 선글라스를 거부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그가 일상에서 경험했던 환상들에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마치 매트릭스 속의 네오와 트루먼 쇼 스튜디오의 트루먼처럼 말이죠.

우리가 사랑이란 주제로 펼쳐지는 따뜻한 막장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가관입니다.
(저는 카르페디엠식 실존주의라고 부르고 싶네요.) 하지만 사람들은 욕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시청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즐겁게 시청할 수 있는 걸까요? 마치 하나도 안 웃긴 코미디 쇼에서 PD의 명령에 따라 울고 웃고 있는 관객들과 잔인한 FPS게임을 하면서 즐거워하고 있는 우리들, 연예인들을 보면서 왜 우리는 부러워할까요?

사회는 이렇게 돈 이야기로 가득한 폭력들이 언제나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현실이 되어 미디어에서도 범죄 사건들로 도배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점쟁이들처럼 우리의 운명이 카드 속에 담겨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린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편안함을 바라고 또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편안하게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향유하면서 놓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살펴본다면 우리가 정치적 존재(시민)으로써 용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영대님의 댓글

서영대 작성일

박명림 선생님께서는 존엄이란 타인을 자신보다 낮게 대우하지 않는 것 뿐만 아니라 왕처럼 대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사람을 물질적인 측면으로 본다는 것은 사람으로 보는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인간 존엄이 잘 실현 되고 잇지 않고 사람에 대한 대우를 잘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명림 선생님께서 이야기 하신 존엄과 대우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한 인간됨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의 삶속에서 이런 것들이 실천되고 있는지 잘 성찰하고 고쳐나간다면 우리 사회가 점차 조금씩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