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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시대, 삶을 긍정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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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2-01 15:45 조회8,44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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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우리는 참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높고 화려한 건물은 경쟁하듯 들어서고,

아파트며 상가며 주차할 공간이 없을 만큼 자동차의 수는 늘어났고,
누구 하나 손에 스마트폰 쥐지 않은 사람이 없지요.

하지만 점점 더 가난해지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언제 일을 그만둬야 할지 모르는 비정규직이 10명 중 4명이 넘고,
일자리가 없어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거나,
대학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알바로 청춘을 보내고 있는 청년도 무수히 많습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고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점퍼로 제집 사정을 가린 요즘 청소년에게서 20여 년 전의 궁티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지요. 그래서 더 가난한 청소년들이 부모를 받아들이고 긍정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
“인생 한 방”, “대박”, “있어(없어) 보인다”와 같은 유행어에서 보듯 이제 우리 사회는 가난을 무능함이나 죄악과 동일시하고 있고, 돈 숭배가 도를 넘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난한 가정의 청소년이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난한 친구와 이웃을 바라볼 때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까요?
- 김미경, 『시꽃 이야기꽃』 중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의 고통과 슬픔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나큰 것일 테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가난을 개인의 무능이라 부릅니다.
게을러서, 무식해서, 심지어 천성이 나빠서 가난해진 것이라 말합니다.
노력하지 않아 공부를 못했고,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버젓한 일자리 구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렇게 얻은 가난은 다 “네 탓”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의 문제는 그를 겪고 있는 사람들 탓이 아닐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만큼 치열한 삶은 없습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도록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땅 투기, 아파트 투기로 돈을 버는 사람이 더 성실하고 현명한 것이 아니듯,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난은 사회 구조적 문제로 비롯한 것이 더 많습니다.

경제적인 가난은 정해진 재화가 제대로 분배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몫을 가지지 못한 자가 생겼다면,
그가 목소리 내어 “나 못 받았어!”라고 외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몫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여기, "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이들의 나눔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겠지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은 병가로 휴직했던 주인공 ‘산드라’가
회사 동료들이 그녀의 복직 대신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는 전화를 받으며 시작합니다.
그녀가 다녔던 회사는 전체 16명이 근무하는 작은 회사였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보너스가 꼭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인이 해고되어서 남편이 보너스를 꼭 받아야 하고,
집을 수리하기 위해서는 보너스가 필요하고,
그녀를 돕고 싶지만 비정규직이라 쉽게 지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도 있지요.

영화는 16명을 산드라가 한 명 한 명 찾아가 자신의 복직을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당신이 보너스를 선택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듯,
내가 복직해서 당신이 보너스를 받지 못하는 것 역시 나의 잘못이 아니에요.”

16명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산드라를 지지해주는 사람들도 있고, 매몰차게 거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인공 산드라가 이야기했듯,
산드라의 해직도, 보너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가난도 모두 그들만의 탓이 아닐 것입니다.
다만, 이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힘은 보너스와 해직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해직하지 않고도, 보너스를 받지 않고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구조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16명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을 발견하고,
또 자신을 지지하고 돕는 동료와 가족을 만나게 되면서
스스로를 경멸하고 포기하려고 했던 우울증에 빠졌던 주인공은
자기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복직하더라도 또 다른 자신과 같은 배제된 자가 언제든 생겨날 수 있는 그 회사가 아니라
다른 삶을 희망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가난이 죄악인 오늘날,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특히 부모님이 가난하여 어쩔 수 없이 가난한 청소년들이 부모님을
그럼에도 사랑하고 긍정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의 주인공 산드라처럼,
우리 모두의 개인 탓이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 ‘가난한 사회’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댓글목록

김영현님의 댓글

김영현 작성일

왜 우리는 가난을 착취나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관용의 문제로 인식하는 것일까요?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행, 봉사적 차원에서만 접근하고 있을까요?
돈의 배분의 문제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도 큰 이상향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복지 혜택을 늘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잉여로 남게되지 않을까요?
이를 우린 '배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난을 없앨 수는 없을까요?
제 생각엔 가난의 대물림은 끊임없이, 아무리 민중들의 욕구를 채운다 하더라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고민해야 될 점은 다시 인디고 서원의 기획처럼 공동의 문제로 돌아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민주주의이란 섬의 진정한 주인들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이 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게 아닐까요? 이 섬을 포기할 것인가? 책임지고 나갈 것인가?의 문제에서 민주주의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가난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가난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지고,
우리가 여전히 이 섬의 생존 경쟁의 피해자, 해골들로써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유렁처럼 그들의 주위를 배회할 것입니다. 이는 지금까지의 섬의 유령,해골들을(역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