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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께 드리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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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1-03-06 11:28 조회1,24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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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 번째 인디고 러브레터

 

지금, 당신께 드리는 편지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2월의 어느 날.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기차역을 향해 버스도 멈춰버린 길을 걸었습니다. 한참을 걸어 목도리 위까지 하얗게 눈이 앉았을 즈음에야 겨우 시간 맞춰 부산행 기차를 탈 수 있었지요. 기차는 마치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관통하듯 철컹거리며 새하얀 세상 속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습니다. 멈춰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시간이 멈춘 그 곳에도 소리 없이 눈이 쌓였습니다.


  경주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탔습니다. 하지만 좌석은 제 옆의 한 자리만 예매를 했나봅니다. 다행히 빈자리가 많아서 모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뒷자리로 옮겨 앉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귀가 멀었습니다. 엄마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수화를 하자 아이가 킥킥거리며 의자 사이로 얼굴을 쏙 내밀고는 저에게 “엄마 오줌 누고 온데.”하고 소리칩니다. 만난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아이의 발가벗은 말이 불쑥 찾아온 순간, 서른 남짓 지나온 내 삶의 시간들이 기차가 지나온 반대편 세상으로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엄청난 질문과 친밀함을 쏟아내는 아이의 갑작스러운 등장이 제 마음속 낯선 문을 활짝 열어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처럼 본능에 충실한, 진실한 대화를 할 것을 요구하는 것 같았지요. 


  아이의 엄마가 돌아왔지만 아이는 그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참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쉴 새 없이 중얼거립니다. 가지고 있던 작은 초콜렛을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포장지로 함께 비행기를, 조각배를, 새를 접었습니다. 울산에서 내린다던 아이는 내릴 역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엄마의 손에 이끌려 일어섭니다. 허둥지둥 내리느라 종이새만 겨우 챙겼을 뿐 짧은 작별 인사를 남긴 채 올 때처럼 그렇게 갑자기 떠났습니다. 


  눈처럼 하얀 쌀밥을 먹다가 와작 돌을 씹은 순간처럼 내 삶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것에 낯설게 부닥칠 때, 그리고 가슴속에 낯설음의 차가운 물기가 차올라 강물처럼 찰랑일 때, 저는 갑자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새롭게 깨어나는 것 같습니다. 아이와 헤어지자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방금 내가 지나온 시간이 정말 세상에 존재한 걸까, 밤새 내린 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침처럼 금세 익숙하고 답답한 세상으로 되돌아올 신기루 같은 것이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별안간 세상에 내던져져 시간과 삶을 부여받은 인간일 뿐인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했습니다. 


  권력에 은폐된 진실, 백화점 안에서만 허락된 자유처럼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수많은 장애물 속에서 늘 깨어있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매 순간 진실에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뜨거운 삶이 있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소외된 90%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깨어있는 한 사람이 있고, 지금 이 순간 이집트와 리비아에서 몸으로 맞서 혁명의 순간을 기적처럼 창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시작되었지만 언젠가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로서 죽음을 맞고야 말 인간 삶의 비밀을 아는 이들은 매 순간 생의 본질적인 감각에 깨어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또다시 잠에 빠져버리는 무수히 많은 삶의 역설 속에 수수께끼 같은 삶의 질문들이 숨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우발적인 사건일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을 이렇게 복잡한 인간 존재의 근원을 깨닫는 데에 온전히 바칠 수 있다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런 존재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여기 그런 인간이 되기를 꿈꾸며, 미숙하고 여린 발걸음이지만 멈추지 않고 지난 5년여의 시간을 걸어온 이들이 있습니다. 인디고잉을 거쳐 간 110여명의 청소년 ․ 청년 기자들, 이들의 실험을 응원하며 흔쾌히 무료로 글을 기고해주신 150여명의 선생님들. 판매 부수가 많지 않아도 마음을 나누어주셨던 전국의 인문학 책방과 향토 서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서투르고 투박하지만 자신의 삶과 이 사회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고민하는 청소년들을 지지하며 때때로 골치 아프기도 한 이 잡지를 구독하고 계신 전국의 340명의 독자 여러분이 바로 그러한 사랑의 주체들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인디고잉의 지나온 5년여의 시간 중에 4년의 시간 동안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인문교양지, INDIGO+ing’이라는 기획을 세상에 펼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부산상호저축은행 임직원 여러분께도 이 미약한 지면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위기의 운명을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보내주신 고마운 지원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서른여덟 번째 인디고 러브레터는 지금까지 인디고잉과 함께 해주신 이 모든 분들과 전국에 더 많은 청소년들 그리고 부모님들, 선생님들께 띄우는 편지입니다. 잠든 일상에 초대받지 않은 낯선 손님처럼 인디고잉이 여러분께 찾아가 작은 파문을 던지고 숨겨진 생의 아름다운 비밀을 함께 고민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세련된 글은 아닐지라도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타인의 고통에 눈 감지 않고, 비판적 지성과 도덕적 품성, 예술적 감성을 지닌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해 진정성 있는 글을 쓰고자 눈물을 삼키며 온몸으로 온 맘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런 글은 돈벌이가 되지 않으니 수익을 내지 못한다면 폐기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로 이 소중한 공론의 장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스물여덟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인디고잉은 중요한 순간의 기로 앞에 서 있습니다. 그동안 부산상호저축은행의 지원으로 돈과 스펙을 위한 글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청소년들의 진실한 목소리를 글로 담을 수 있었던 인디고잉은 갑작스럽게 맞은 지원 중단의 상황을 여러분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편지를 받으신 당신께, 인디고잉을 구독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미 구독하고 계시다면 정기구독 기간을 연장해주시거나 주위 분들께 정기구독 선물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정기구독을 하셨다가 중단하셨다면 다시금 구독을 이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정기구독을 포함하여 매호 1천5백 명이 인디고잉을 돈을 주고 구입한다면 한 기업이나 한 개인의 용기 있는 기부가 아니라 1천5백 명의 숫자에 더해진 더 큰 연대의 가치로 위기의 순간을 커다란 한 걸음으로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이 신기루처럼 역사의 시간 앞에 사라진 폭설의 아름다운 한 장면이 되지 않도록 인디고잉을 만드는 모든 삶의 순간마다 분명히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성찰하고 비판하는 글을 쓰겠습니다. 1천5백 명의 힘이 더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쓸모 있는 인문학을 향한 어렵고 하염없는 여정을 더 많이 알리고, 책임 있게 동참할 영혼의 동지들을 모으는 것에도 게으르지 않겠습니다. 


  긴 편지를 마치며 편지로 맺어진 이 우연의 인연이 삶에 대한 지속적이고 충실한 뜨거운 사랑으로 창조되기를 꿈꾸며 당신께 시 한 편을 드립니다. 인디고잉의 뜨거운 청혼을 받아주십시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인중을 긁적거리며

심보선

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천사가 엄마 뱃속의 나를 방문하고는 말했다.
네가 거쳐온 모든 전생에 들었던
뱃사람의 울음과 이방인의 탄식일랑 잊으렴.
너의 인생은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부터 시작해야 해.
말을 끝낸 천사는 쉿, 하고 내 입술을 지그시 눌렀고
그때 내 입술 위에 인중이 생겼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잊고 있었다.
뱃사람의 울음, 이방인의 탄식,
내가 나인 이유, 내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
무엇보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
그 모든 것을 잊고서
어쩌다보니 나는 나이고
그들은 나의 친구이고
그녀는 나의 여인일 뿐이라고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믿어왔다.

태어난 이래 나는 줄곧
어쩌다보니, 로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로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깨달을 수 있을까?
태어날 때 나는 이미 망각에 한 번 굴복한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영혼 위에 생긴 주름이
자신의 늙음이 아니라 타인의 슬픔 탓이라는
사실을, 가끔 인중이 간지러운 것은
천사가 차가운 손가락을 입술로부터 거두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모든 삶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고
태어난 이상 그 강철 같은 법칙들과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쩌다보니 살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쓰게 된 것이 아니다.
나는 어쩌다보니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나는 홀로 깨달을 수 없다.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추락하는 나의 친구들:
옛 연인이 살던 집 담장을 뛰어넘다 다친 친구.
옛 동지와 함께 첨탑에 올랐다 떨어져 다친 친구.
그들의 붉은 피가 내 손에 닿으면 검은 물이 되고
그 검은 물은 내 손톱 끝을 적시고
그때 나는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다는 듯
인중을 긁적거리며
그들의 슬픔을 손가락의 삶-쓰기로 옮겨온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
삼일, 오일, 육일, 구일……
달력에 사랑의 날짜를 빼곡히 채우는 여인.
오전을 서둘러 끝내고 정오를 넘어 오후를 향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기는 여인. 그녀를 사랑하기에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죽음,
기억 없는 죽음, 무의미한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일랑 잊고서
인중을 긁적거리며
제발 나와 함께 영원히 살아요,
전생에서 후생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뿐인 청혼을 한다.

 

*탈무드에 따르면 천사들은 자궁 속의 아기를 방문해 지혜를 가르치고 아기가 태어나기 직전에 그 모든 것을 잊게 하기 위해 쉿, 하고 손가락을 아기의 윗입술과 코 사이에 얹는데, 그로 인해 인중이 생겨난다고 한다.

 

 

인디고 서원 김미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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