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청세

[다음_스토리펀딩] 정의로운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 7화 "가난한 사회 고귀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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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07-27 14:42 조회1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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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인문 토론의 장 정세청세의 이야기 “정의로운 청소년, 세계와 소통하다”를 
소셜펀딩 페이지 ‘스토리펀딩’을 통해 소개합니다.
정세청세 활동을 하며 청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배움과 실천을 이어온 
청년 10명의 이야기를 3월부터 연재하고 있습니다.

스토리펀딩 7화 “가난한 사회 고귀한 삶”이 실렸습니다.
2017 정세청세 행사기획팀을 이끌고 있는 청년 이성지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매마르지 않고 샘솟는 것이 저에게는 희망입니다.
가난과 우울 속에서도 정세청세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저에게는 희망입니다.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들, 지금 이 순간도 삶의 기로에 선 상처받고 있는
청소년들이 제가 정세청세에서 만난 찬란한 삶의 스펙트럼을 목격하면 좋겠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또한 빛나는 다양성의 일부가 되겠지요.
희망함으로, 이 가난한 사회에서 고귀할 것을 희망합니다.

이 청년의 정의로운 목소리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스토리펀딩을 통해 모금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펀딩 모금액은 전액 청소년 인문·문화·교육 활동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비용으로 사용됩니다.


 

[스토리펀딩_7화]

 

가난한 사회, 고귀한 삶

 

이성지


 안녕하세요. 13살 겨울, 부산의 인디고 서원에서 처음 정세청세를 접한 후 청주에서 정세청세 기획팀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성지라고 합니다. 올해에는 총괄기획팀 내 행사기획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약 8년 간 정세청세를 하면서 고민하고, 절망하고, 또 무언가 가치있는 것들을 찾아왔습니다.

 

 가난하고 불안한 삶들을 치유하고 싶어서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불평등의 비극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그늘을 드리우는지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가장 심리지원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제대로 된 심리치료 지원이 부족하다는 모순적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부조리한 현재를 바꿔나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한 때, 그저 비관적인 청소년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정세청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여러분에게 정세청세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정세청세와의 만남 

 2009년 겨울, 저는 그저 부산에 간다는 설렘에 들떠있었습니다.  그 날이 저의 첫 부산 방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서원에 도착하여 명찰을 받고, 청소년 기획팀들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간 곳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황색 조명아래 눈부시게 소란스러운 삶들이 가득 들어차있었지요. 아직도 그 순간은 뽀얀 심상으로 남아있습니다.

 당시, 저는 13살의 몽상가로, 어른들이 보기에 의뭉스러운 아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주 외로웠습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저는 유별난 아이였기에,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부산에서 만난 정세청세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언니 오빠들과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니!’ 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나이도, 학교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말하고, 받아들여지는 경험. 여태까지의 나날 중에 가장 생소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이러한 세상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의견을 말할 때, 미움받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 없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 흠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이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연애로 수줍지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꿈을 쫓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양한 삶들이 정세청세 행사장에 빼곡했습니다.

  그간 일상 속에서 정세청세와 같은 소통의 장을 갈구했는데도, 막상 그 공간에서 느낀 낯섦은 어색하기까지 했습니다. 왜 나는 이제까지 이런 삶의 가능성을 몰랐던 것일까. 분명 같은 세상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이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다면, 이런 별천지를 평생 만나지도 못할 뻔 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를 표현하는 것이 13살이나, 지금이나 어렵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은 나를 온전히 수용할 오아시스를 찾고 있음을 말입니다.

 정세청세는 제가 처음 만난 오아시스였습니다. 

 

가난한 사회
 청주에 돌아온 후, 저는 청주 정세청세 청소년 기획팀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학교에 갇혀서 매일 같은 얼굴을 봐오다가 정세청세에서 전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것이 활동의 또다른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매 달 얼굴을 비추는 단골 참여자들, 새로운 참여자들, 그리고 함께 공부하고 토론했던 기획팀원들.

 만남을 지속하면서 우리는 매번, 우리의 불행과 불안을 마주했습니다. 참여자, 기획팀원 가릴 것 없이 각자의 상처를 숨긴 채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학업에 대한 압박, 학교에서 당한 부당한 대우, 가정에서 당한 폭력- 친구에게서 배척받는 괴로움.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세청세를 하면서도 매일 밤 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정세청세를 하는 것은 너무나 벅차고 감동적이지만, 빛나는 시간이 끝나면 여전히 저의 현실들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난했고, 우울했고, 괴로웠습니다.

 정세청세 기획회의가 있는 날이나 행사가 있는 날은 기대감과 뿌듯함,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저의 우울증이나, 주변 환경들이 그곳에서 저의 생각을 말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으면, 여전히 그대로인 나의 삶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환희와 비슷한 정도의 절망은 반복되어 저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매번 ‘괜찮아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에겐 정세청세에서 목격한 삶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세청세에서 만난 수많은 삶들, 그 눈부신 삶들이 언젠가는 분명 나에게도 존재할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심리상담을 받기도 하며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나갔습니다. 청소년 기획팀도 계속 해나갔습니다.

 그러나 나의 잘못이 아닌 불행은 지루하게 반복됩니다. 어렵사리 부모님을 설득해 시작한 미술은 고3이 되어 가난과 우울에 부딪쳐 뒤늦게 그만두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나 미술 그만둘래’라고 말했었지만, 그 후, 대학에 오기까지 저는 거의 매일 밤마다 몸을 뒤틀면서 울었습니다. 아직도 어머니는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에게 더 나은 삶이란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사실은 이런 시련이 처음이 아닌데도, 현실과의 타협들은 나의 지난 학창시절만해도 몇번이고 반복되었는데도, 저는 매 순간 마지막같았습니다. 그 이상은 없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가난은 비슷한 비극과 불행들을 자주 동반하니까요.

 불안할 때, 정세청세를 같이 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마주친 빛나는 깨달음들은 저를 구원하기도 했지만, 때로, 그곳은 저에게 닿지 못할 세계 같았습니다. 저는 가능성들에 매번 시련을 극복했지만, 나아가는 것은 더디게, 뒤로 밀려나는 감각은 생생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희망을 품기란 불가능한 듯이 느껴졌습니다.

 

더 나은 삶을 믿는 방법

 저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학교에 신물이 난 17살에, 저는 학교에서 작은 심부름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상담, 가정통신문 대신 내주기, 노트필기 빌려주기 등 크고 작은 일들을 해주고 대가를 받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숙제는 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대가란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1원도 괜찮고, 친구의 장난스런 포옹도 괜찮고, 포스트잇 한 장이어도 되었지요. 대가를 받는 것은 일종의 의식이었습니다.

 저는 꽤나 진지하게 시작한 사업(?)이었습니다만, 아이들까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우리반 아이들의 1/3정도는 저의 심부름 센터에 의뢰를 했고, 교무실의 몇몇 선생님들도 저를 ‘흥신소’라고 부르며 장난스레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 덕분에 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와서 만난 아이들은 모두 지치고 아팠습니다. 서로를 의식하며, 닮으려고,  또한 달라지기 위해 무던하게도 노력했습니다.

 해당 학년에서 가장 웃기고, 활발하다는 평가를 받던 우리반은 학교에서 실시한 심리검사에서 전교에서 가장 많은 우울증 위험군이 모여있다는 결과를 받게 됩니다. 아무도 서로가 우울증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해서 더 충격적인 결과였습니다. 아이들이 먼저 상담을 의뢰하기 시작했고,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사망, 가정폭력, 학대, 성폭행, 가난, 왕따-

 수많은 삶들이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가능성들이 길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더 슬픈 것은, 그 모든 게 익숙한 광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것, 스트레스 받는 것 전부 일상의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겐 이 밖의 삶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더 나은 삶의 존재는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가난한 사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회의 삶들은 착취의 연속 속에서 ‘생존’을 위해 ‘삶’을 내던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절망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분명히 존재하는 그 작은 희망을 우리는 어떻게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빛나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는 것, 비판적 대화를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모두가 같은 목적지를 향해 달려갈 것을 종용받는 시대에, 정세청세라는 장소에서 소통하고, 다양한 삶을 목격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가치있습니다. 나와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리하여 더이상 숨을 쉬어 생명을 잇는 행위에 ‘삶’의 의미를 빼앗기지 않는 것. 산다는 것이 더디지만, 나아간다는 것을 느끼는 것.
저는 그렇게 더 나은 삶을 믿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가난하고, 꿈꾸는 것마다 현실에 가로막히는 것이 훨씬 많아 절망합니다. 그리고, 후에 희망합니다.

 

가난한 사회의 고귀한 삶들

 우리는 가난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사치이고, 평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범하게 노력해야합니다. 고통을 직면하는 것조차 호화로운 일이라는 우리는 가난한 사회의 고귀한 삶들 입니다.

오늘도 공부를 하면서 결핍을 먼저 실감합니다. 몇만원차이로 소득분위에서 멀어져 근로장학생이 되지 못하고, 등록금을 지원받지 못하는 지금. 누군가는 몇 만원이 없어 자살충동 속에서도 상담소를 찾지 못하는 지금. 누군가는 부모님이 바라는 미래를 위해 금전적 지원을 저당잡히는 지금, 모두 저의 모습이자, 제 친구, 동료, 어쩌면 여러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고귀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는 나 스스로 그렇게 느끼지 못한대도, 우리는 고귀한 존재들 입니다.

 청소년 기획팀 때, 함께 했던 언니 오빠들은 현재 모두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유학을 가고, 누군가는 대학을 가고, 누군가는 대학을 가지 않고, 누군가는 연애를 하고 있으며, 누군가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짧은 젊은 시간, 함께 고귀한 가치를 향했다는 것이 저에게는 희망입니다.

 여전히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매마르지 않고 샘솟는 것이 저에게는 희망입니다.

 가난과 우울 속에서도 정세청세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 저에게는 희망입니다.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들, 지금 이 순간도 삶의 기로에 선 상처받고 있는 청소년들이 제가 정세청세에서 만난 찬란한 삶의 스펙트럼을 목격하면 좋겠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 또한 빛나는 다양성의 일부가 되겠지요.

희망함으로, 이 가난한 사회에서 고귀할 것을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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