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독서회

2018년 6월 4주 모임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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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호 작성일18-06-20 17:12 조회182회 댓글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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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6 27 수요일 오후 7

장소 : 에코토피아

: 고기로 태어나서 / 지은이: 한승태 / 출판사: 시대의창

 

 처음 참여하시는 분들은 해당 책을 읽으시고참석 의사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됩니다.

 인디고서원과 함께 하고서원을 지지하는 의미에서 수요독서회의 대상 도서는

인디고서원에서 구입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참석 여부와 그날 저녁 식사를 에코에서 하실지 여부에 대한 댓글을 주시면 준비에 

 도움이 된답니다고맙습니다 

 

https://youtu.be/pOWtPo7Agaw 


 

댓글목록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1. 참 재미난 책이다. 그 점에서도 이 책은 좀 특별하다. 그 첫째가 표지에 있다. 제목이 거꾸로 적혀 있는 바람에 책을 다시 펴 들 때마다 매번 속았다. 뒤집어서 한번 더 바로잡기를 여러번... 실수가 반복되니 실소가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를 맡았으니 기본은 해야지 싶어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읽었다. 틈틈이 거북하고 구차해서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내용도 살뜰히 읽었다. 그래도 독서가 수고스럽지 않은 것은 책이 이미 견줄 수도 없는 수고를 묵묵히 견디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책에서 땀냄새가 났다. 아니 역한 노린내와 짐승들의 악다구니 같은 이명이 들리고, 글자들이 답답한 지면에 갇혀 미쳐갔다.

나는 이런 글을 좋아한다. 고매한 뜻을 전하는 글보다 아예 몸과 밀착되어 피부처럼 반응하는 글을 나는 좋아한다. 이 때 글은 더이상 글이 아니다. 하나의 살아 있는 소리요, 표정이며, 살을 에는 자극이다. 그래서 변변한 참고사진 하나 없어도 포르노 잡지를 보듯 내 몸이 먼저 반응하는 이런 글을 나는 경외한다.

2. 먼저 작가의 수고에 감사한다. 그 수고로 인해 우리의 현실에서 감춰지고, 지워진 세계를 명징하게 보여줘서 반갑다. 그 세계는 어쩌면 우리의 의식이 미지의 세계로 끝까지 남기고 싶어하는 오지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가 더이상 없다고 들었건만, 그 또한 낭창하고 한량한 얘기였음을 깨닫는다.

작가는 그 오지를 탐험하는 탐험가이다. 오염되고 더럽혀진 땅, 그 위에 구축된 음침하고 탐욕적인 세계를 작가는 투신의 형태로 고발한다. 칼을 품은 목적의식 없이 투신은 불가능하다. 그 때문에 더 외로웠을 것이다. 몸이 느끼고 내놓는 단순명료한 답에 매일 딴지를 걸며 견뎌야 했던 시간과 끝까지 그 세계에 대한 인정과 전복의 경계에 서야 했던 그의 지성에 그저 감복할 뿐이다.

문제라면, 그가 다녀온 세계도 동시대의 엄연한 현실이라는 게 문제다. 지금 내가 발딛고 서 있는 곳에서 그대로 이어진, 다만 표지의 제목처럼 거꾸로 세워야만 비로소 읽히는 현실인 것이다. 내가 그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작가는 묻는다. 무엇을 할 것인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게 날 살아 있게 한다.

김양희님의 댓글

김양희 작성일

참석합니다

백혜진님의 댓글

백혜진 작성일

참석합니다^^

손병철님의 댓글

손병철 작성일

참석합니다

김지선님의 댓글

김지선 작성일

참석합니다

김석화님의 댓글

김석화 작성일

참석합니다

하늬바람님의 댓글

하늬바람 작성일

참석합니다

박소연님의 댓글

박소연 작성일

참석합니다 :)

도현맘님의 댓글

도현맘 작성일

참석합니다

김금옥님의 댓글

김금옥 작성일

(저자의 인상이 좋네요...저는 이번 수독도 다른 일이 있어요ㅠㅠ...독후한 거라도 올립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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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에 헨미 요의 <먹는 인간>에서 ‘사람이란 너도나도 음식을 먹는 기관’임을 함께 읽었었다. 우리가 맞는 ‘이 포식의 시대가 나중에 되갚아야 할 빚처럼 공복의 시대로 변하는 것이 그리 먼 훗날의 일이 아닐지도 모르다’고 지적하는 저자의 우려에 더불어 한승태의 <고기로 태어나서>를 통해 더욱 ‘식과 생의 숭고함에 관하여’ 낮은 자세와 시선을 돌아보게 된다.

‘음수사원飮水思源’이 떠올랐다. 과연 그 근원을 생각해가면서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할 때 양심이나 윤리라는 기준에서 몇 발자국을 뗄 수 있을까. 아예 무지로써 마음 편한 길을 택한 지난 시간들이 숱하다. 중간 중간 빵 터지는 유머를 내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장식 농장 ‘그것’의 냄새와 광경이 코와 눈을 괴롭혔다. 채식을 찾는 수고로움에 지쳐 육식을 멀리하는 것도 고역이다. 채식주의자가 아니지만 당분간 치킨이나 돼지고기도 가까이 두고 싶지 않다.
스트레스를 맛난 것을 찾아 양껏 먹는 것으로 푸는 시대다. 100년 수명을 채우고도 넘쳐날 먹거리와 그것을 광고하는 먹방 프로그램 그리고 갖은 수를 발휘하여 기발하게 채우는 레시피 그러나 지구 반대편서 바짝 말라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늘고 긴 끈을 잡고 있는 시대다.
내 배만 부르면 크게 무감한 듯 살아갈 사람에게 죽비 같은 책이다. 그러나 배부른 자가 이 책을 거머쥘 수 있을까 싶다. 다 읽기도 전에 눈은 감겼고, 책은 의자 밑으로 떨어질 듯.
처절한 광경에 불편한 읽기였지만 이런 감수 없이 실재를 접하기도 어려우리라. 모두가 양계장, 부화장, 비육 농장 등에서 일할 순 없을 테니까 말이다.
야만의 고통을 줄이려는 마음을 내야한다. 더디고 복잡한 현실이지만 훗날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서라도.

‘“너는 나다”라는 착각 속에서는 넋을 견디는 긴장과 혼돈이 필요하지 않다. 넋을 마주하려면 일상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정희진)처럼 가혹하게 나를 밀어붙일 용기는 없다. 다만 이 책을 만나 이후 아직까지 긴장으로 끼니를 대하고 있다는 것, 아마 곧 끝나겠지만 읽는 도중 마주한 욕지기는 내내 마른 흔적처럼 희끗희끗하리라.
‘고기를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이 어떻게 먹고 살고 있는지 보고싶어’ 시작한 저자의 글이 ‘육즙이 흐르는 삼겹살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당신과 고기 사이에 어떠한 환상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떤 목표였다면 너무도 성공했다.
나는 저자가 힘겹게 대면한 기록에서 ‘기억을 나눠 받아먹었다’(먹는인간,헨미 요).

<참고>
 “말없이 다가오는 존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길” “ 인간은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존재에 귀 기울이는 존재의 이웃”이라 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말한다.
‘시골의 철학자, 숲의 철학자라는 별칭처럼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황폐한 도시적 삶을 반성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하루라도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안심이 되지 않는 우리의 일상은 생태의 구성원인 다른 존재를 도구 취급하며 파괴한 대가가 만들어낸 것’ 철학의 다른 버전이다.

<‘대량도축 시대’ 동물 고통 앞 인간도 ‘말 못할 통증’ 마주한다>
  -전의령의 동물이야기/전염되는 고통(2018.06.08. 금요일 경향신문)

...인류학자들은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정치적,문화적 그리고 의료적 문제들을 완전히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이른바 ‘사회적 고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인간의 고통은 단순히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통증’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제도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조슬린 포르셰는 그와 같은 의미에서 동물을 고통을 느끼는 주체로서 정의하고, 그 고통의 최소화라는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동물복지라는 장치가 정말로 동물의 고통을 제거하고 있는가에 대해 흥미로운 방식으로 문제제기한다. 포르셰는 전통적으로 가축과 가축을 키우는 사람들간의 관계가 “거리 두기의 곡예”로서 묘사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전통적 농업 환경에서 가축으로서의 동물들과 그 가축을 키우는 농부들 사이에 일종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그와 같은 감정은 가축이 도살되는 시점에서는 거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애정이 생겨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면 안되는 이 상황은 애착과 무관심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것과도 같다.
 포르셰에 따르면 이와 같은 관계의 성격은 지금의 대량화된 축산 산업에서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며, 여기서 ‘고통’은 축산 노동자와 축산동물 사이에 공유되는 무엇이 된다. 즉 고통은 단지 대량 생산되어 대량 도축되는 동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그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 노동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무엇으로서 이해된다. 축산 현장에서 개별 노동자가 감수하게 되는 고통은 신체적,정신적,도덕적 차원에서 복잡하게 얽혀 생산/재생산 된다. 여기서 고통은 작업 자체의 고된 성격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고, 개별 동물들에 대해 몇 킬로그램의 고기인 동시에 또(동물복지라는 차원에서) 감정을 가진 존재로 접근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으로부터 기인하기도 한다. 또한 또 다른 존재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즉 도살이라는 행위를 통해) 느끼게 되는 고통은 윤리적 차원의 딜레마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원의 고통은 항생제를 투여함으로써 동물의 신체적 고통을 감소시키고, 궁극적으로 식품 안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물복지 제도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포르셰에 따르면 동물복지는 어떤 고통은 제거하지만 동시에 어떤 고통은 감추기만 할 뿐인 제도가 된다.

...어느 수의사의 죽음...이 이야기는 포르셰가 말한 축산 노동자들과 축산동물들 사이에 전파되는 고통, 즉 물리적 통증을 넘어선 ‘사회적 행위와 관계’로서의 고통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마도 고통의 제거 내지 축소를 표방하는 사회적 제도하에서 또 다른 고통이 생산되고 있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많은 국가에서 유기동물보호소라는 시설은 동물복지라는 제도적 차원에서, 특히 안락사라는 특정한 개입은 입양과 같은 장기적 보호의 가능성이 부재한 경우, 또는 질병∙부상이 초래하는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회복 불가능한 경우 차라리 죽는 것이 그 동물의 행복과 안녕에 이로운 것이라는 동물복지의 윤리적 자장 안에서 가능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치와 개입 속에서 또 다른 고통이 만들어지고 해소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사회적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고통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해소 가능한 것일까? 또는 누군가의 고통은 이를 목도하는 또 다른 누군가를 감염시키고 함께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아닐까?


책에서-----------------------
“우리는 취약한 생물이고 인간들은 바로 이 취약함을 공유한다.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희망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취약함을 부정하기보다는 받아안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취약함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을 때 또렷하게 분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4)

동정심도 그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닭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것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은 다음 저 산 너머로 차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 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19)

폭력적인 역사가 사람들에게 남긴 가장 큰 해악은 우리 삶의 변화가 한두 사람의 지도자 덕분이라고 믿게끔 만든 데 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성공을 두 손으로 일군 당사자들은 역사의 들러리로 물러나 버렸다. 하지만 지난 겨울의 경험은 역사의 공을 몇 안 되는 정치가들이 독차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깨닫게 했다. 좋은 리더십의 중요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풍족한 것은 결국 우리가 그만큼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이 너무 건방진 생각이라면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또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또 그들의 이웃과 동료들이 열심히 일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메마른 강을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은 소나기가 아니라 길고 지루한 장마다. 바짝 말라붙었던 한강 역시, 한 줌의 ‘위인들’이 뿌린 소나기가 아니라 이름 없이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모이고 쌓여 다시 흐르게 됐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67)

매일 아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면 바위 아래 깔려 있다가 그걸 밀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푸드 파이터가 핫도그를 삼키듯 그날그날 작업을 소화했다. 직장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기업계의 유명인사들이 아니라 먹기 대회 선수들에게서 찾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그들은 이걸 왜 먹어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맛이 어떤지 음미하는 법도 없이 그냥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도 어제를 오늘로 밀어내고 오늘을 내일로 밀어내고 일하는 날을 쉬는 날로 밀어 내고 다시 일하는 날로 밀어냈다. 이 경기에는 대상도 특별상도 없었다. 모두가 보잘것없는 참가비만 손에 쥐고 물러날 뿐이었다.(374)

골디락스 존이란 항성 주위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을 가리킨다.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으려면 태양과 같은 항성으로부터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곳에 위치해야 한다...골디락스 존에 해당하는 일자리란 급여는 충분하면서 관리자의 감독과 감시로부터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일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선 구직자들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지구 같은 별을 찾는 천문학자보다 확률 높은 게임을 하고 있다고 봐야겠지만 근래의 실업률을 보면 골디락스 존을 찾아내는 일은 지구 안과 밖을 가릴 것 없이 험난하기만 하다.(413)

“나는 이제껏 살면서 뭘 해도 지배를 했지 남의 지배를 받으면서 일한 적은 없는 사람이야.” 그의 말속에는 이 개 농장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잔인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다른 존재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해보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사람이었다. 내가 지쳐서 노골적으로 힘든 내색을 해도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당시에는 그가 나를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내 오해였다.
그에게는 사람이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땡볕 아래서 일을 하게 되면 느기게 될 괴로움을 머릿속에서 떠올려보는 능력이 부족했다. 말하자면 그는 다른 존재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에 철저하게 무능했다. 이 농장은 그러한 상상력의 결핍 위에 세워진 궁전이었다.
갑이 을의 처지를 상상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면 인간이 동물의 고통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동물은 특히나 식용 가축은 인간 앞에선 영원불변의 을일 테니 말이다. 이곳은 케이지 하나에 여러 마리의 개를 넣고 기르다 보니 서로 싸우고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414)

자신의 죽음을 방관하는 동물도 없고 손쉽고 간편한 죽음 같은 것도 없다. 동물을 죽이려면 살아남으려고 발악을 하는 그들의 품속에서 목숨이라는 것을 폭력을 써서 빼앗아야 한다. 내가 금산의 양계장에서 본 것처럼 비참한 삶을 사는 동물일지라도 자신의 생명이 멈추는 걸 막기 위해서라면 미친 듯이 저항할 것이다. 바로 그 비참한 삶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이 동물이 품고 있는 생명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목숨을 빼앗을 때에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도태시켰던 모든 돼지들의 죽음 뒤에는 살이 빨리 찌지 않는다는 아주 사소한 이유만이 존재했다.(437)

개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면 개와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추슬러야 했다. 하지만 나는 미련하게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 돼.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과 비례해서 나 자신이 대단히 선량한 존재라는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아마도 이런 점이 감상적인 인간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한계를 인정하고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평형을 찾는 대신 스스로를 순교자의 자리로 몰아붙이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임계치를 향해 조급하게 달려갔다. 마침내 더 이상 개들을 참을 수 없게 됐을 때 내가 사장보다 더 지독하면 지독했지 조금도 덜 하지 않았다.(443)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언제나 천사가 되려던 자들이 짐승이 되고 만다.(파스칼,팡세)
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견해는 현실과 최초로 맞닥뜨리는 순간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조지 오웰, 위건부두로 가는 길)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선량함을 의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된다.(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444)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445)

주묘희님의 댓글

주묘희 작성일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