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들

[제91회] 이현우 선생님과 함께한 주제와 변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3-09 11:19 조회166회 댓글0건

본문

역사의 시간과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초인

 

 

 

정리 조찬희(18세)

 

 

고등학생이 된 지 벌써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답답한 입시 교육과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경쟁, 시험에 치이고 과제에 치이고 친구에 치이면서 정신없이 날마다 숨 가쁘게 살았습니다.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가? 내가 옳은 길로 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도 사치가 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생각할 시간에 그냥 공부나 해라”는 말을 들을 때면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습니다. 그러던 도중 이현우 선생님의 『너의 운명으로 달아나라』를 읽었습니다. 이 책은 니체 철학을 담은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는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입니다. 과연 저는 제 운명을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과연 지금 우리 각자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단지 운명을 피하기만 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우리의 삶 안에서 진정으로 운명을 사랑으로 대한 적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 마음을 안고 이 책의 저자이신 이현우 선생님을 초청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제91회 주제와 변주를 시작하였습니다.

 

 

 

사회자 이현우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디고 서원에 청소년들을 만나러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선 이전에도 몇 번 인디고 서원에 오셔서 청소년과 청년을 만나셨습니다. 오늘 이렇게 다시 오게 되셨는데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현우 제 책을 이렇게 열심히 읽고 저를 초대해준 것이 강한 인상이 남습니다. 특히 현재 중・고등학생이 읽기는 상당히 어려운 책이었을 텐데요.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이렇게 책을 읽고, 토론을 나누는 청소년들이 한국 인문학의 미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진한 책을 읽고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디고 선생님께서는 이 책에서 니체의 ‘운명애’에 대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개인들이 운명애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 모인 한 사회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운명애’를 추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현우 사회철학자로서 니체를 어떻게 봐야 할지는 어려운 주제입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니체는 사회철학자는 아닌 것으로 보여요. 니체는 특히 민주주의와의 불편한 관계가 있습니다. 또한 니체는 이상사회에 관해서 회의적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니체를 공적 영역의 철학자가 아닌 ‘사적 영역의 철학자’로 구분했습니다.

로티의 구분법을 따라서 니체를 사적 영역의 철학자로 본다면, 그런 니체에게 공적 영역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습니다. 사적 영역의 철학자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공적 철학자들은 롤스나 하버마스 등이 있습니다. 공적 영역의 철학자와 사적 영역의 철학자는 위상학적으로 다릅니다. 교집합이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 두 상황을 연결지어서 생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공동 영역의 척도로 니체는 충분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며,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루터, 인간이 직접

신과 교통하는 길을 열다

 

 

하지만 조금 다른 맥락에서 니체의 철학을 본다면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독일 정신사적 관점에서 보는 니체입니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독일 정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세 사람이 있다면 루터와 괴테 그리고 니체입니다. 루터는 독일어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 역사에서 괴테 또한 아주 큰 의미가 있습니다.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성직자가 아니라도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루터 이전에 중세에는 사제계급을 통하여 신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번역되면서 신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괴테가 있습니다. 괴테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근대로 이끕니다. 이후에 니체가 있습니다.

중세까지만 해도 민중의 대다수가 문맹이었습니다. 그것이 루터 이후 바뀌게 됩니다. 당시 교회에서는 면죄부를 판매했습니다. 쉽게 말해 거짓말을 한 거예요. (웃음) 죄를 저질렀는데 돈을 내고 용서받았던 것이죠. 어떤 사람이 교회에 찾아와서 “제가 거짓말을 했는데요”라고 했다면, 거기서는 “어디 보자, 얼마짜리를 써줘야 하나” 했습니다. “제가 살인을 저질렀습니다”라고 하면 “그래? 넌 좀 비싸” 하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일반 민중들은 원래 그렇게 해도 되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신학도이니 라틴어 성서를 직접 읽었습니다. 성서 어디에도 면죄부에 대한 내용이 없었어요. 루터는 그래서 양심상 이를 수용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성서에는 그런 교리가 없다는 반박문을 낸 것입니다. 루터의 고발로 인해서 성직자들과 지배 권력은 더 이상 다수의 민중을 속여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제 계급을 거치지 않고 신과 직접 교통하는 길을 열었던 것이 루터입니다. 인류는 한 단계 진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괴테, 인간의 욕망을 구원하다

 

 

루터에 이어서, 괴테가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서 인류를 근대로 이끕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구원을 받습니다. 원래 르네상스 시대에 파우스트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마음껏 욕망했던 파우스트는 결국 마지막에 지옥에 떨어집니다. 원래 파우스트는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존재로 소개됩니다. 당시로써는 굉장히 불경한 것입니다. 인간이 신과 같은 인식을 갖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희한한 사례입니다. 만학을 섭렵하여 신적인 존재가 되겠다는 것 말이죠. 그래서 결국 파우스트는 마지막에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괴테는 그런 파우스트의 결말을 바꿉니다. 파우스트를 구원합니다. 이것은 아주 큰 정신사적 전환이자 발전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바, 원하는 바를 불경스러운 것까지 모두 포함하여 추구하더라도 마지막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일종의 새로운 길이 열리는 거예요. 르네상스까지는 인간이 욕망할 수 있다고 말은 하지만, 끝이 안 좋습니다. 그러나 괴테는 전작들과 달리 정신사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런 파우스트를 흉내 낼 수 없더라도 사람들은 책에서 가상으로 이입하여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

 

 

괴테는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노력하고 실천하는 자는 방황하는 것입니다. 방황은 실수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방황하고 실수하기 때문에 벌을 받는데요. 그런데 괴테는 그것을 허용해줬어요. 방황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 방황의 계기는 노력한 것이기 때문에 허용한 것입니다. 오히려 거꾸로 방황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 자는 노력하지 않는 자예요.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요. 내가 지금 방황하고 있는가, 내가 지금 실수하고 있는가 말이에요. 뒤집어서 이야기하자면 지금 방황하고 있지 않는 자는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거예요. 모범생들한테는 조금 찔리는 이야기에요. (웃음)

칸트의 핵심 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인 정언 명령은 “감히 알려고 하라”입니다. “감히 알려고 하지 말라”라고 했던 창세기의 금언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감히 알려고 하라. 그렇게 해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책임은 신이 진다”는 것입니다. 감히 알려고 해도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정치철학자로 보자면 칸트나 괴테는 보수주의자입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이들이 내던진 메시지는 상당히 진보적이에요. ‘신이 뒤를 받칠 테니 충분히 방황하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학생이라면, “엄마 나 1년 휴학할게요” 하는 거죠. 괴테파 부모라면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웃음) “괜찮아. 노력하는 한 방황 하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1년쯤 세계여행 해도 될까요?”라고 묻는다면요. 마찬가지로 “괜찮아 다 갔다 와. 그 시행착오 속에서 뭔가를 배울 거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테주의이며 칸트주의입니다. 루터로부터 괴테까지 한 단계까지 진전된 거죠.

 

 

너 자신이 신이 되어라

 

 

괴테와 칸트는 그 이전 시대가 지정한 인식의 한계를 넘어가도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종의 새로운 라이센스를 괴테와 칸트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것입니다. 그다음 니체로 갑니다. 니체는 우리가 잘 아는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너 자신이 신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 개념들이 순차적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물어볼 수 있겠죠. “꼭 루터-괴테-니체여야 해? 바꾸면 안 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 돼요. 루터-괴테-니체 순입니다. 그게 독일의 정신사적 전개입니다. 루터에서 열린 가능성이 괴테에서 확장되고 그것이 니체로 가는 길이죠. 우리가 독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새로운 삶의 루트입니다. 독일산입니다. (웃음)

그렇다면 니체가 “충분한가”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렇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물론 자신이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100년 뒤에나 읽힐 것이라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절반은 맞았어요. 실제로 가장 어려운 책이고 상당히 많은 오해를 받은 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책은 1885년에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나온 지 130년이 넘었습니다. 니체가 말한 100년은 넘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 아는 체, 읽은 체를 해도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웃음)

 

 

죽음의 허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데 니체가 약간은 불안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원회귀 사상 때문입니다. 기독교를 비롯하여 대부분 종교는 내세관을 갖고 있어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고 두려움은 인간에게 아주 원초적인 감정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하고, 허무하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은 한창때이긴 하지만 불의의 사고로 가까운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나거나 하는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지인이나 가족들도 그렇죠. 그러면 인생은 뭔가 하는 회의에 빠지게 돼요. 열심히 공부해서 뭐하나. 열심히 일해서 뭐하나. 이렇게 죽음은 모든 것을 무화시킵니다. 여기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잖아요.

『무진기행』의 김승옥 작가가 자신이 교회에 다니게 된 계기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어요. 이 양반이 4남매 중에 맏형이었는데요. 막내 여동생이 한창 오빠를 따를 어린 시절에 죽어요. 여동생을 땅에 묻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보니까 거기서 여동생을 만난다고 이야기합니다. 분명 여동생은 차가운 땅에 묻혔는데, 그게 끝이 아니고 내세에 가게 되면 그때에 다시 다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당시 어린 김승옥은 그게 솔깃한 거예요. 그래서 교회 열심히 다니게 된 거죠. 또 열심히 다녀야만 만난다고 했다고 합니다. 띄엄띄엄 다니면 안 돼요. (웃음) 한 개인의 사례이지만,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적 믿음이 어디에 호소하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주변 사람의 죽음은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절박한 문제에요.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사라졌어요. 다시 회복하고 싶어요. 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따라서 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원론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종교는 죽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내세관입니다.

그런데 내세관은 살펴보면 정밀하지 못하고 허술한 구석이 있어요. 그래서 종교는 더 이상의 물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대범하게도 계속 물음을 던지는 것이 이성입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내세관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공백이 있습니다. 니힐리즘이라 불리는 허무입니다. 원래는 내세관이 채우고 있던 그 공백에 대신하여 가져다 놓은 게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세는 없지만, 죽음으로 완전히 끝나는 게 아니라 이것이 반복된다고 말합니다. 영원회귀는 완전한 니힐의 수용이 다음 단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 중간에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전에 있는 것이 내세관입니다. 그래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했을 때 여기서 종결되는 것은 아니고 더 나가는 어떤 길에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니체는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데요. 능동적 허무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니체는 후기에 영원회귀라는 아이디어를 갖게 되면서 굉장히 뿌듯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뿌듯한 일인가 의문입니다. (웃음) 왜냐하면 저는 굳이 영원회귀가 필요하지 않고, 능동적 허무주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니체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저의 견해입니다. 책에는 담지 않았지만 조금 보충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인디고 인문학 수업을 하는 중에 한 학생이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질문하면 “네가 더 깊이 생각하면, 넌 그 문제를 틀리고 말 거야”라고 말을 들었다고 말이죠. 어째서 인간의 사유를 더 깊게 하기 위한 교육의 장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 할까요.

방금 들었던 독일 정신사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끝없이 자유롭게 사유하고자 하고, 있는 그 자체로 자기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와 교육이 이를 가로막는 것이지요.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막는 여러 장애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현우 장애물이 없지 않고, 없을 수 없으며, 장애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문제입니다. 그런데 과거와 비교해보면 지금 상태가 훨씬 더 나은 상태입니다. 조금씩 나아져 온 도정이 있죠. 시험에 관한 문제를 말씀해주셨는데, 그 문제도 이전에는 훨씬 더 억압적이었어요. 지금은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는 정도가 되었잖아요. 그다음에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장애는 일종의 도전 과제에요. 극복해야 하는 거지요. 이걸 껴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시간

 

 

역사적 변화라고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역사의 스케일은 개인사적 스케일과는 조금 단위가 달라요. 개인사는 20~30년이 서너 번 반복하면 종료됩니다. 제가 소설에 대한 강의도 많이 하고 있는데요. 인간적인 시간에서 20~30년이 지나면 느낌이나 감각이 별로 없습니다. 이것은 생애주기와도 관련된 부분인데요. 하루살이가 느끼는 시간과 80년 정도를 사는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아주 다릅니다. 극단적인 예라고 하면 사형수의 마지막 5분이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보면 사형수가 그 5분을 나눠쓰려고 합니다. 2분은 뭐에 쓰고, 2분은 뭐에 쓰고, 남은 1분은 뭐에 쓰고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게 주어진 생의 시간 전부라고 한다면 그 안에서 생을 다 살아야 해요.

우리는 대게 80년 정도로 인생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 이전 세대는 이것보다 짧았고, 이후 세대는 이보다 길게 100년 정도로 짤지도 모릅니다. 이게 개인적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시간에 대한 느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3년 정도 재수하면 어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웃음) 이때 시간이 길다, 짧다고 하는 느낌이 있는데요. 이 느낌은 무엇에 견준 것일까요. 바로 80년이라는 인생에 비춰서 그 기간 안에서 3년 정도면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고 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장수거북이처럼 200년을 산다면 느낌이 또 다를 거예요. “3년 가지고 뭘 그래, 한 30년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시간입니다.

 

 

역사의 시간

 

 

인간의 시간에 대해서 말씀드린 건 역사의 시간은 또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시간,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은 신상품입니다. (웃음) 19세기 정도에 만들어집니다. 역사적 시간은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느껴봤어?, 역사 냄새 맡아봤어?” 이 질문이 성립하지 않지요. (웃음) 역사에 대한 감각은 후천적으로 탄생했거나, 우리가 변신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역사의 흐름에 대한 인식이 탄생하는 것이 19세기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라는 것을 느끼려면 역사가 움직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세까지의 역사는 움직임이 없었어요.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았어요. 더 나아지는 것이 없었죠. 그게 역사의 변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역사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혁명 이후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왕정복고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프랑스 혁명에서 황제의 목을 자르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공포정치로 국민들이 숨죽이며, 왕정이 복고되고 떠났던 귀족들이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아, 안 되는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 계속적인 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을 이어가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게 돼요. 제가 역사의 사이클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예시가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1789년에 끝난 일회적 혁명이 아니에요. 1789년부터 1870년까지가 혁명의 주기예요. 혁명으로 인해 결과가 나왔고 그것이 안정화 되는 시기이죠. 우리가 역사를 경험한다고 하려면, 그 정도 시간을 살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지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이죠. 이러면 이제 목 빠져요. (웃음)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우리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은 지금 이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80년을 살지만 어떤 역사적 주기는 몇백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역사를 느낄 수 없지만, 그런 핸디캡을 안고도 역사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 안에 예정되어 있던 진로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길게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선택이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디고 말씀을 들으면서 뭔가 머릿속에서 촉수가 하나 나온 느낌입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촉수 말이죠. (웃음) 그런 게 있으면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버틸 수 있을 수 있는 힘을 주지 않나 합니다.

 

이현우 맞습니다. 없는 걸 만들어 갖는 것이죠. 감각기관 하나씩 말이죠. (웃음)

 

 

인디고 지금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영원회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살아온 삶 자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삶이 반복되기를 바라며 ‘죽음’을 선택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죽음으로써 다시 행복을 반복하려고 하는 그 행위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현우 행복도 죽음도 둘 다 어려운 주제입니다. 행복도 잘 따져봐야 합니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행복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려고 하면 어려워집니다. 인생을 보면 누구나 뒤끝이 좋지 않습니다. 늙고 병들어서 고생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죠. (웃음) 자연사적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결국엔 늙고 병들어서 힘이 빠지며 죽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행복한 상태가 인생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그 끝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은 선택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행복이 과연 인생의 목적인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듭니다.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과 개념이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행복은 지속적인 활동에서 오는 만족감이지 순간적인 행복감과는 관계가 없어요. 흔히 가장 행복한 순간의 예로 로또에 걸린 사람들을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속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직분에 맞는 일을 꾸준히 해나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글을 성실히 써나갈 때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의 딜레마

 

 

또 다른 차원에서 쾌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쾌감이 지속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또 그렇지가 않아요. 가령 성적 흥분이 끊이지 않고 지속되는 질병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해요. 보통 그런 성적 쾌감을 느끼고 싶어 하고, 또 이것이 순간적이어서 아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지속적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은가 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병이며,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또 한 가지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볼 지점은 바로 ‘행복한 사람은 행복에 대해서 의식하는가?’입니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공백과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을 행복에서 추락시키게 됩니다.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다는 것은 행복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행복이 갖고 있는 구조적 모순이에요. “너 행복해?”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 “난 행복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왜냐면 행복을 의식하는 순간,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하냐고 묻는 사람들은 사실 모두 적이에요. (웃음) 동료나 친구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이 질문은 ‘너 행복하지 않지?’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행복의 딜레마입니다.

 

 

 

주권자의 죽음

 

 

한 가지 죽음과 관련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도 자기 자신의 결정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의 표준적인 정의는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완성되었다는 것은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림으로 치자면 액자입니다. 액자가 없으면 예술이 성립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려면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해요. 죽음 또한 자기 결정의 결과여야 한다면 길은 자살밖에 없습니다. 죽음 두 종류밖에 없어요. 자의에 의한 죽음과 타의에 의한 죽음이죠. 타의에 의한 죽음은 주권적 태도라고 할 수 없고, 예술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주권자의 죽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죽음입니다. 독일에서는 자살을 ‘자유죽음’이라고도 불러요. 자기 의지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사에 의한 죽음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죽고 싶지 않지만, DNA들이 총파업을 하는 것이죠. (웃음) “더는 못 살겠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하는 겁니다.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원리적으로는 이게 맞습니다. 행복과 죽음은 많이 생각해볼 주제입니다.

 

 

인디고 책을 읽으면서 니체의 철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초인’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초인은 가치를 재창조하고 명령하면서 기쁨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런 초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과연 이러한 현대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또 그런 초인들이 지금 당면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이현우 초인은 신의 죽음 이후에 도래하는 것입니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분신이자 동시에 초인의 모델입니다. 그런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사실은 차라투르스트라가 초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마치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으로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시범 조교 같습니다. (웃음)

 

 

가치의 입법자

 

 

초인의 여러 정의가 있는데요. 하나는 ‘가치의 입법자’입니다. 모든 가치를 다시 매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가격표를 다시 붙이는 것입니다. 원래 가격이 붙어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가격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는 기존의 어떤 가치나 기준, 규범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바꾸고, 파괴하고, 넘어서는 것이 예술 활동입니다. 그것이 예술가로서 초인의 형상입니다. 그러므로 니체 철학이 예술가 철학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가 나쁜가, 바람직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별도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이 초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인데요. 그건 먼저 초인이 된 다음에 해야 하는 질문이 아닐까요. 이것도 하나의 모순인데요. 초인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남에게 묻지 않아요. (웃음) 초인은 자기가 인식하는 자, 판단하는 자, 결정하는 자, 평가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자문을 구하지 않습니다.

 

 

진행 중인 초인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초인이 되었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초인이 되어가는 자’입니다. 완료형이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인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에는 짝 개념이 있는데요. 바로 ‘말인’입니다. 번역에 따라서 ‘최후의 인간’이라는 얌전한 표현도 있는가 하면, ‘말종 인간’, ‘종말인’, ‘미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말인은 현재의 쾌적한 삶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가진 인간,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키는 개념입니다. 니체는 말인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니체와 민주주의와의 불화예요. 니체는 현 단계의 인간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고, 극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현재 존재하는 다수 민중에 대한 긍정이죠. 따라서 민주주의와 니체는 맞지 않습니다. 니체는 정치 철학적으로 민주주의와 불편한 관계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니체는 충분히 오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나치에 의하여 한번 남용되기도 했습니다. 앞서 니체는 사적 영역의 철학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게 영역을 넘어서서 공적 영역에 적용될 때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니체가 생각한 초인의 규정은 ‘인식하는 자, 깨달은 자, 평가하는 자, 남의 생각이나 판단에 따르지 않고 자기 판단을 따르는 자, 자기 삶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다는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초인을 폭넓게 보면 무엇인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초인의 자격이 있어요.

저는 한시적 초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성에 따라서 밥을 먹고 잠을 잘 때도 초인인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잘 때도 초인이야. 저 사람은 코를 골아도 초인처럼 골잖아.”(웃음) 저는 무언가를 평가하고, 새로운 가치를 내는 순간순간에 우리가 초인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시간을 우리는 조금 늘려갈 수 있어요. 평범한 일상은 초인과 관계가 없지만,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할 때 우리는 초인의 ‘모드’가 됩니다. 니체를 우리 식으로 이해해보는 것이지요.

 

 

나약함의 철학,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철학 중엔 강함의 철학도 있지만 나약함의 철학도 있습니다. 나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일회성의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의 일회성이 뜻하는 바는, 밀란 쿤데라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한 번 살고 끝이라고 하는 것, 이것이 반복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긍정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니체에게도 영원회귀라는 방패가 필요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나약함에 대하여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내세가 없다는 것, 일회적인 삶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단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지금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요. 내세가 있었으면 싶습니다. 그것을 진정 받아들이기까진 한참 세월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그것이 한 ‘방향’일지 모른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아직 조금 멀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의 자손의 자손이 되면, 한참 뒤가 되면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계보가 그려집니다. 강의 서두에 루터-괴테-니체로 이어지는 정신사에서 또 다른 철학자가 어느 시점에서 등장할 수 있어요. 저는 그가 무엇을 말할지에 대해서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니체의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역사적 스케일 속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생에서 만날 수 있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